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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일본군무장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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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文春文庫社의 日本軍艦戰記 -半藤一利-님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물은 2차 저작물이기 때문에, 아야코의 허락없이 무단게재 및 도용은 금지합니다.

-가미가제 특공의 선두

아리마 마사후미有馬正文
1895년 출생. 가고시마현 출신. 졸업성적은 95명중 33번째. 해대졸. 수뢰분야에서 항공분야로. 전사후 중장.

088936.bmp1943년 10월, 남태평양해전에 있어 항모 쇼가쿠의 함장으로써 분전했던 투장이다. 일본군의 공격이 효과를 거두고, 적기동부대가 퇴각하려할 때, 기동부대의 사령부(나구모츄이치 지휘)는 이걸로 전과는 충분하다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자신의 좌승한 쇼카쿠가 중파당하면서도 이 사람은 완강히 [철저히 추격해야한다]라는 의견으로 정황을 상세히 말했지만, 사령관은 간단히 공격을 중지시켜버린다.
뒤에 전투보고를 들은 야마모토이소로쿠 연합함대사령장관은 물었다. [조금 더 추격할 순 없던겐가?] 라고. 과묵한 용장은[그것이 고작이었습니다]라며 대답해버렸다. 야마모토 장관 전사뒤에 이 일을 후회한 이 사람은, 이 뒤에는 확실히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
[전황이 이처럼 악화된 것은, 어디까지나 추격을 해서 적을 꺾는다는 기백이 일본군에게서는 부족해서다. 젊은이들은 앞에 내세우고, 어른이 뒤에서 지시해가는 것은, 이긴 싸움일때는 좋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으로는 안된다. 나는 예비학생의 제도로 하여 파릇한 청년들을 많이 전장으로 보냈다. 이제부터는 어른이 먼저 죽는게 순서다]
1944년 10월, 제26항공전대 사령관으로써 필리핀에 있던 그는, 적기동부대의 내습을 맞아서, 도금된 소장(小將)의 금장을 쥐어들며, 육상공격기에 뛰어들었다. 그의 말대로 스스로 진두에서서 필사필중의 특별공격에 출격하였고, 귀환하지 않았다. 가미가제 특공의 선두라고 해도 좋다.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고

이토 세이이치伊藤 整一
1890년 출생. 시즈오카현 출신. 해병 39기. 졸업성적 148명중 15번째. 해대(우등)졸. 전사후 대장으로 진급.

703384.bmp1941년 9월에 군령부차장으로 착임. 44년 12월까지 전쟁의 태반을 해군중앙에서 있었고, 전쟁지도를 해왔다. 그뿐아니라 전략전술적인 면이 너무나 서툴러서 많은 장병을 죽게한 일로 강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1945년 1월, 제2함대 사령장관에 착임. 뒤늦게나마 제1선에 섰다.
그러나 잔존주력은 십수척, 게다가 기름도 바닥나고 있었다.
그런 중장 지휘의 함대에 명령이 떨어진 것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직후인 4월. 두뇌가 명석하고 합리주의적이라고 칭송받던 중장은, 하늘에서의 원군이 없는 알몸 함대의 출격이 작전이라고 할수 없는 무모한 계획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억인의 총특공의 선두가 되었음 싶다]라는 토요다소우부 연합함대사령장관의 한마디로, 말이 없이 명령을 수행했다.
4월 7일에 출격을 한 이토”자살”함대는 “예정대로” 미공군의 맹공격 앞에서 규슈 坊ノ岬 앞바다에서 괴멸했다. 중장은 야마토의 함교에서, 막료가 [작전을 중지할 수는 없습니다. 구축함이 아직 건재합니다. 옮겨타서 오키나와에 돌입해야합니다……..]라는 반대론을 누르고, [작전중지, 잔존함정은 내지로 귀환하라]라며 강하게 명령, 그리고 장관실로 들어가 자물쇠로 잠궜다.
최후의 최후가 되어서, 자신의 무능한 작전지휘력에 대해서 속죄를 하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상부에서의 명령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의사결정에 의하여, 많은 부하를 살리고, 자신은 살려고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과 두뇌

이노우에 시게요시 井上 成美
1889년 출생. 미야기현 출신. 해병 37기. 졸업성적 179명중 2번째. 해대졸. 전후에는 침묵으로 종시. 197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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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고 넓은 시야로 전쟁의 결말을 꿰뚫어본 얼마되지 않는 군인중 한명이다. 개전전에,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 삼국동맹을 맺는 것에 요나이 미츠마사(米內光政) 海相, 야마모토이소로쿠차관과 함께 군무국장으로써 맹반대를 했던 것도, 개전 직전에 항공본부장으로써 개전의 어리석음을 잘 설명한 것도, 이 사람의 탁월한 세계관에 의한 것이다.
1941년 1월, 오이가와코시로해상에게 제출한, [신군비계획론]은, 이지적인 분석력, 객관적인 판단력, 규격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에 기초한 전략관의 결정체였다. 해상결전주의등은 케케묵고 미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통론했고 [전함은 불필요. 남태평양의 섬들을 기지로써, 항공기를 해군의 주력으로써 해야한다]라고 주장했지만, 해군전략의 전통인 거함거포주의의 흐름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중앙에서 쫓겨나 제1선에 서서 제4함대 사령장관으로써, 산호해 해전의 총지휘를 했지만, 그의 싸움방식은 용맹심과 결단력이 빠졌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아서, 병학교(兵學校) 교장으로 좌천되었다. 전쟁말기에 요나이(米內)해상을 도와서 차관으로써 중앙에 복귀, 종전 공작에 노력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지나치게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고는 하는일마다 육군과 충돌하여 [요나이와 이노우에에겐 해군만 있고 나라는 없다]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야했다. 1945년 5월, 대장으로 진급과 함께 요나이해상은 결국 이사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그 두뇌와 차가운눈을 개전전에 활용해야했지만, 그것을 뒤로하여 패배했다.

-원저 : 한토 카즈토시
-번역 : 아야코

3 thoughts on “태평양전쟁-일본군무장편(1)

  1. 허어….울 나라에 저거의 반쪼가리나 따라갈 인간들이 몇이나 될까요.(적국이지만, 결행력만큼은 독립 열사님의 투혼(?)에 뒤지지 않군요.-_-)

  2. 한 미국자료에 실린 간략 설명문에서 발췌.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보조문 정도로 해둘까요.

    Arima//전쟁 말기에 제 26항공전대를 지휘. 적의 기동타격대에 의해 휘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자 스스로 전투기에 탑승하여 적군을 향해 돌격, 산화하였다.

    Ito//오키나와 해전에서 전함 야마토에 탑승하여 제 2함대를 지휘. 이 자살이나 다름없는 작전이 실패로 끝날 것이며, 전세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음을 익히 알면서도 출진, 전사하였다.

    Inoue//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크게 반대하고, Axis 삼국동맹에 대해 이의를 제기, 개전 이전까지는 반전파에 속했으나 개전 이후로는 항공병력의 증가에 힘쓰는 등 강병을 꾀함. 산호해 해전에서 짓쳐들어오는 적 기동함대로부터 퇴각을 결행, 그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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