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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타쿠미

이글은 저의 은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안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그는 조선사람 스스로도 알고 있지 못했던,
조선문화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정립한 뛰어난 안목을 가진 일본인이다.
그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14년의 일이다.
그 전 해 1913년 조선의 소학교 선생으로 온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을 따라, 나무를 심고 관리하는 조선의 산림기사로 온 것이다.
그 두 형제는 이 땅 조선에 오자마자 자신들의 본업은 잊은 채 조선자기에 반하고 말았다. 어느집이든 문만 열고 들어서면 툇마루 끄트머리에 나뒹구는 막사발에 조차 담긴 조선도공의 혼이 그들 눈에는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들은 틈만 나면 조선 곳곳을 돌며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결국 독학으로 공부해 조선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적은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銘考’를 저술한다

그 때

조선은 이미 일본에 합방되었던 시기
땅 한 뙈기 없는 백성들은 남부여대(男負女袋)지고 이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정든 땅 다 버리고 만주로 만주로 먹고 살 길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그들이 지고가는 짐보따리에는 하나 같이 개다리 소반 밥상이 묶여져 있다.
집 버리고 땅 버리고 길 떠나는 처절한 신세에 왜 그들은 그 잘난 밥상 하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조선민족에게 밥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래서 아사카와 형제는 조선의 밥상을 통해 조선자기와 함께
또 하나의 조선의 얼굴인 조선의 공예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반상盤床은
3대 명산지에서 만들어졌다
전라도 나주반盤
경상도 통영반
황해도 해주반이 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주엘 가도 또 통영엘 가도 나주반,통영반은 구경을 할 수가 없다.

오랜동안 잠들었던 조선의 얼을 깨운, 또 하나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조선시대에 그려진 우리 그림의 하나인 민화(民畵), 그 격식을 벗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이룬 세계 어느 미술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바로 그 민화를 민화(民畵)라고 이름 붙여준 장본인.

그가 바로 야나기 무네요시다.
조선시대에는 어찌나 민화가 많이 그려졌던지, 신분에 상관없이 어느 집엘 가든 그림을 볼 수가 있었고, 어찌나 그림이 차고 넘치던지
천장에까지 그림을 붙였으며, 병이 생기면 그림을 그려서 병을 물리칠만큼 그림의 용도는 다양했는데, 정작 그것을 만들어 쓰고 있던 우리는 그것이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고 있던 시절이었다.

경기도 광주에는 국립수목원이 있다.
시방 그 근처는 마구 파헤쳐져, 그 인근 일대가 갈비집 동네가 되어져 있지만, 시방도 그 광릉을 찾아가보면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 나무들은 모두가 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심어놓은 것들이다.

그 숲길을 지나면 한 귀퉁이에는

조선을 사랑해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 묻힌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이 있는데
그의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타쿠미에 관한 글 소개(링크)

1 thought on “아사카와 타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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