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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일본군무장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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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文春文庫社의 日本軍艦戰記 -半藤一利-님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아야코의 허락없이 번역한 것 자체를 다른곳에 무단게재 및 도용은 금지합니다.

-분전하며 전진만이 있을 뿐

우가키 마토메宇垣纏
1890(메이지23)년생. 오카야마(岡山)현 출신. 해병40기, 졸업성적 144명중 9등. 해대 졸업. 그의 일기[전조록(戰藻錄)]은 귀중한 기록. 해군중장.


개전직전부터 야마모토이소로쿠(山本五十六)연합함대사령장관이 전사할때까지, 그의 참모장으로써 작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사람을 상당히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좋은 보좌역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첫번째로 [철가면]이라는 별명이 붙은 오만불손한 성격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총수의 근원은 인격이다]가 신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략관은 외골수의 거함거포주의였다. 용전 역투형의 투장으로 전투방식의 거의 전진 또는 전진의 과격함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모토장관 전사시에 자신도 중상을 입고 병상에 있던걸 제외하면, 항상 제1선에 몸을 두고 싸웠다.

전세가 불리해진 후반부에서도 지휘방식은, 마치 죽을 곳을 찾는 듯한 분전이었다. 마리아나해전, 비도해전에서는 전함 야마토에 좌승하여 싸웠고, 오키나와결전에서는 규슈의 최전선기지에 있던 특공작전의 지휘를 했었다. 항공결전이 된 전투양상에 늦지않고 쫓아가는 전술적 탁월함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또한 절망감이 깊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저녁, 중장은 가까스로 죽을 곳을 얻게된다. 많은 특공전사의 혼에 사죄하기 위해, 패전의 책임을 죽음으로써 속죄하기 위해, 중장은 하늘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特功の花散りしきて春ぞ逝く

그의 전중일기에 남겨진 중장의 시구였다. 하이쿠를 읊는 풍류가의 일면도 있던 것이다.

-문인제독의 비극

오이카와 코시로及川古志郎
1883(메이지16)년생. 이와테(岩手)현 출신. 해병31기졸업, 졸업성적 188명중 76등. 해군대장. 1958(쇼와33)년 沒.


본적은 이와테현이지만, 니이가타(新潟) 코시군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에츠로(越郞)만, 뒤에 코시로로 개명한다. 1938년 4월부터 40년 5월까지, 차이나 방면 함대사령장관으로써 중일전쟁 때의 해군 총지휘를 했다. 그 뒤에 급하게 코노에후미마로(近衛文麿)내각의 해군대신으로 기용되었다. 인간적으로 역량에 넘친 대임을 짊어진 점에서 이사람에게 있어서도 국민에게 있어서도, 큰 불행이었다.

삼국동맹 체결과 미일개전시 최후의 결단과, 두 번에 걸친 해군의 대표로써 대답을 해야만 했을 때, 결국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해군군인으로써는, 군정(軍政), 군령(軍令), 함대 등, 어느것에 있어서도, 좋은 군인으로써 엘리트였던 제독은, 결국은 정치적으로는 용장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이상 해군이 반대하는 것은, 이미 국내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이유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궁극의 이유였던 것일까?

다만, 이 사람의 문인기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병학교장의 시절, 관사의 서책은 병학교의 도서관보다도 충실했었다고 한다. 해군대신시절, 자택의 광하나가 완벽한 도서관이 되어 있었다.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가 어울렸다.

대전말기인 1944년 8월, 그러한 문인제독에게 군령부총장이라는 대임을 맡기게 된것부터가 해군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의심해보고 싶다. 학식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의 본질은 모두 해군인사기용의 실패가 지당한것일지도 모른다.

-“기동부대”의 입안자

오자와 지사부로小沢治三郎
1886(메이지19)년생. 미야기(宮城)현 출신. 해병37기, 졸업성적 179명중 45등. 해군중장. 1966(쇼와41)년 沒.


해군대장진급을 고사하고, 중장인채로 일본해군의 최후의 연합함대사령장관을 역임했다. 七高중퇴 뒤에, 병학교에 입학했다는 별종. 1941년 10월에 해대(海大)교장에서 남방파견 함대장관이 되어, 말레이작전의 성공에 크나큰 공적을 올리고, 더욱이 자바상륙작전에도 강력한 지원병력을 보내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육군의 신망이 두터웠고 해군에서 으뜸가는 명제독의 평가를 높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전략전술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태평양전쟁의 사명을 얻은 “기동부대”의 구상은 이 사람이 세계에서 최초로 제언(提言)한 것이었다. 항공부대를 어떻게 조직하고,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싸울까를 종합적으로 유연하게 생각한 지휘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인사의 연공서열 때문에, 전쟁말기의 뒤치다꺼리를 맡아서 패한 불운한 사람이었다. 그의 구상이된 기동부대를 시작으로 하여 지휘한 것은, 1944년이 되어서부터였던 것이다.

동년 6월 마리아나해전에서는, 제1기동함대장관으로써 훈련이 불충분한 항모부대를 가지고, 병력이 2배인 강력한 고속항모부대와 싸워야만 했다. 이 때문에 적군 비행기의 항속거리 밖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가한다는 아웃레인지(Out Range)전법의 묘계를 고안했지만, 어찌할 도리없이, 신예의 기함인 타이호(大鳳)를 시작으로 쇼카쿠(翔鶴)를 파괴당하고, 마리아나지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후에는 [죽어버린 남자다]라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전혀 말을 하지 않는 패장으로 시종일관했다.

2 thoughts on “태평양전쟁-일본군무장편(2)

  1. 어디서 본 글인데..진짜 전범들은 주동한 청년장교파라고?수뇌부들은 확전을 말리다가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갔다는 쪽이라는데요. 과연 그러했는지? 또 그런 놈들의 색출 처리가 이루어졌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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